THE PEOPLE VS. THE SCHOOL SYSTEM

의사가 심장수술을 통해 한 아이의 삶을 구할 수 있다고 한다면 훌륭한 선생님은 한 아이의 심장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죠

뜨고, 지고, 나갔다가, 돌아오고, 나고, 죽고를 반복.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안에서의 생활, 쌓여가는 지식에 반해 소멸되는 삶. 이 커다란 굴레 속에서 우리는 과연 그 지식이 지혜로 완성되어 후대에 좋은 기운을 물려주고 있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든 것에 대한 조바심은 접어두세요. 소멸되는 삶입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어리석어요. 반해서 잠깐 살다 죽을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어리석죠. 세상은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저 역시 꽤 오래 살았는데도 ‘절대 자연’의 법칙 안에서의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방향성을 잃게 만드는군요. 방향을 잃어버렸을 때는 역시 아이머큐리 셋탑 내비게이션 CSS3입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천재다” “그런데 물고기를 나무 타올라가는 능력으로 평가하자면 그 물고기는 평생을 스스로가 바보라고 생각하면서 살 것이다” 배심원단 여러분, 오늘 우리는 ‘근대 학교 제도’를 재판합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학교는 물고기를 나무에 오르도록 만들 뿐만 아니라 나무를 타고 내려오게도 만들고, 단축 마라톤도 달리게 만듭니다. 학교는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자랑스럽습니까? 수백만의 사람들을 로봇으로 만들어 놓고, 그게 재미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그 물고기 같은지 아십니까? 교실을 거슬러 헤엄쳐가며 자신의 재능은 발견하지도 못한 채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하고, 쓸모없다고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 때가 왔습니다. 더 이상의 변명은 필요 없습니다. 저는 학교를 법정에 세워 기소합니다. 창의성을 죽이고, 개성을 죽였으며 지적으로 학대 해왔습니다. 학교는 오래전 세워진 기관이며, 이제 시대에 뒤떨어져 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것으로 제 모두 발언을 마치겠습니다만 만약 증거를 제시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증명해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재판장 : 계속하세요)
이것이 현대의 전화기입니다. 알아보시겠죠? 이것은 150년 전의 전화기입니다. 아주 다르죠? 더 봅시다. 여기에 오늘날의 자동차가 있습니다. 그리고 150년 전의 자동차가 있지요. 정말 다르죠? 그렇다면 이걸 보세요. 이것이 오늘날의 교실입니다. 그리고 여기 150년 전의 교실이 있습니다. 자, 이제 좀 부끄러워지셨습니까? 말 그대로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바뀐 게 없습니다. 이러고도 학생들의 미래를 준비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 증거를 보면 저는 묻지 않을 수 없네요. 학교는 미래를 준비하는 곳인가요, 아니면 과거를 준비하는 곳인가요? 제가 학교에 대한 뒷조사를 좀 해봤더니, 자료들에 따르면 학교는 사람들을 공장에서 일하도록 훈련시키기 위해 생겨났더군요.
이제야 좀 이해가 되었습니다. 학생들에게 똑바로 오와 열을 맞춰서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하고, 말하고 싶을 땐 손을 들라고 했던 이유를요. 밥 먹을 시간 조금 주고, 8시간 동안 시키는 대로 생각하라고 하고요. 아, 그리고 1등을 하라고 하죠. 품질등급을 나누는 그 숫자요. 1등급 고기처럼. 알겠어요.
우리는 모두 과거로부터 왔지만 과거에 얽매여 살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한테 필요한 건 로봇 같은 좀비가 아니에요. 세상은 계속 바뀌고 있고 우리는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해요. 창의적으로, 혁신적으로, 비판적으로, 독립적으로. 하지만 서로 관계 맺는 능력과 함께요. 모든 과학자들이 똑같은 두뇌는 하나도 없다고 말하죠. 둘 이상의 자녀를 가진 부모들도 그게 맞다고 말할 겁니다. 그러니 설명해보세요. 왜 학생들을 다 똑같이 취급하나요? 마치 쿠키 틀로 똑같은 모양을 찍어 내거나 프리사이즈 스냅백 야구모자처럼요. ‘한 사이즈밖에 안 나오지만 대충 맞아요’라는 헛소리만 하면서. (재판장 : 표현에 주의하세요) 죄송합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의사가 모든 환자들에게 똑같은 약만을 처방한다면 그 결과는 매우 끔찍할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더 고통에 빠지겠지요. 그런데 학교에 가보면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교육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지 않아요. 교사 한 사람이 20명의 아이들 앞에 서있습니다. 아이들은 각자 다른 장점과 다른 욕구, 다른 재능과 다른 꿈들을 가졌는데도 학교는 똑같은 것을 똑같은 방식으로 가르치죠. 정말 끔찍해요! 여러분 피고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일어난 것 중에 최악의 범죄일지도 모릅니다. 거기다 자기가 고용한 사람들에게 한 짓까지 생각하면요. (피고 : 이의 있습니다.) (재판장 : 기각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더 듣고 싶네요.)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선생님들 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직업이죠. 그런데 그분들이 박봉에 시달리고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아이들이 학교를 통해 별로 변화가 없다는 게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네요. 좀 솔직해 봅시다. 선생님은 의사들 만큼 보상받아야 합니다. 의사가 심장수술을 통해 한 아이의 삶을 구할 수 있다고 한다면 훌륭한 선생님은 한 아이의 심장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면 그 아이는 진짜 자신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들은 비난받는 영웅들 같은 존재에요. 하지만 선생님들이 문제는 아니죠. 교육과정은 정책 입안자들이 만들죠. 그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서 누굴 가르쳐본 경험이 전혀 없는데도요. 그러니 표준화 시험들에만 매달리죠. 사지 선다 시험 속에서만 헤매고 있어요. 그게 성공을 규정한다면서요. 그건 참 기이한 일이에요. 사실 이런 시험들은 실제로 사용하기엔 너무 부실해요. 그래서 폐기되어야 합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닙니다. 프레드릭 켈리. 그는 바로 표준화 시험을 개발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이야기 한 것을 인용한 겁니다. “이 시험들은 너무나 부실해서 폐기되어야 한다.” 배심원단 여러분 우리가 계속해서 이런 길로 간다면 그 결과는 정말 치명적입니다.
저는 학교에 대해 별다른 신뢰가 남아있지 않지만, 인간에 대한 신뢰는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료도 자동차도 페이스북 페이지도 모두 개인에게 맞춰진다면 교육 역시 그렇게 개인에게 맞춰져야 합니다. 업그레이드해서 바꿔야 하지요.
학교에서 가르쳐준 대로 사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학생 각자의 그리고 전체 학생의 가치를 가져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중핵교과라는 건 없애고, 그 대신에 모든 교실에 있는 모든 심장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물론 수학이 중요할 수도 있지만 미술이나 춤도 중요하죠. 모든 재능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이게 꿈같은 이야기로 들리실 수도 있지만 핀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이런 인상적인 일들이 일어납니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은 더 짧고 교사들에 대한 처우는 꽤 괜찮으며, 숙제는 존재하지 않고, 경쟁보다는 협동에 초점을 맞추죠. 그렇지만 여러분 매우 인상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 나라의 교육 체제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놀라운 성취를 내고 있습니다. 싱가폴을 비롯해서 다른 나라들도 그런 방법을 뒤쫓아 가고 있습니다. 몬테소리 학교나 칸 아카데미 같은 것들로 말입니다.
정답이 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시도해 보는 거죠. 왜냐하면 학생들은 전체 인구의 20%쯤 되겠지만 우리 미래의 100%이니까요. 그러니 그들의 꿈들에 관심을 가집시다. 무엇을 성취할지 미리 정해놓지 말고요. 이런 세상이 제가 믿기에는 물고기가 더 이상 나무를 기어오르지 않아도 되는 곳입니다. 이상입니다.
번역 하태욱 건신대학원대학교 대안교육학과 교수.